[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신라 분열 속 후백제와 고려의 '바다 쟁탈전'…견훤의 후백제는 국제관계에 해양능력 활용

입력 2021-11-08 09:00  


고대를 돌아보면 신라가 주도한 소위 ‘삼국통일’은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외세를 끌어들였고, 발해의 부활로 남북으로 재분단된 불완전한 통일이었다. 또한 그 폐해가 역사적으로 계승돼 지역갈등이라는 또 다른 분열을 재생산하는 구실을 줬다.

신라는 9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떨어지고, 지방을 통제하는 기능을 상실해갔다. 또한 거듭되는 실정과 계속되는 흉년으로 경제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권력 쟁탈전에서 소외당한 세력은 재야세력으로 힘을 기르고, 지방에서 태동한 자생적인 호족세력들이 발호했다. 특히 해안지방에는 상업을 바탕으로 한 경제력과 강한 군사력을 갖춘 군소 해양세력이 빠르게 성장했다.
신라의 분열과 해양 세력의 등장
훗날 경기만의 강화도 일대를 기반으로 성장한 왕건과 그의 동맹이 된 김포·풍덕·파주·인천·안산·남양(화성시)·평택·당진·나주 등의 해양 세력이 있었다. 금강 세력인 견훤과 우군인 섬진강 하구(순천) 세력, 그리고 동해중부의 명주(강릉) 세력 등도 있었다. 이 무렵 신라 해적이 활동을 재개해 일본의 공물선을 약탈했고, 규슈 북부 해안과 대마도를 몇 차례 공격해 동아지중해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처럼 신라 하대는 해양호족이 우후죽순처럼 대거 등장하고, 신라 사회의 해체와 새로운 통일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해군력을 동원한 전쟁이 벌어졌다
견훤의 후백제 건국
이 시대 가장 강력한 해양 세력은 견훤(甄萱)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경상도 상주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이씨였으며, 신라의 중앙군으로 출발해 서남해에서 해양방어를 맡은 군인이었다. 그의 세력은 백성들의 불만과 옛 백제 땅이라는 민심을 활용해 달포 사이에 규모가 5000여 명에 달했다. 892년에는 자신을 왕이라 칭하면서 ‘후백제’를 건국했고, 900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한 뒤 후삼국 통일전쟁에 뛰어들었다.

후백제는 927년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침공해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웠으며, 고려와 벌인 전투에서 승리하며 세력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930년 고려와의 고창(안동) 전투에서 대패했다. 또 934년에는 웅진(공주) 이북의 30여 성을 빼앗겼다. 그 후 주도권을 상실하고, 왕실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해 935년에 견훤은 고려의 왕건에게 귀순했고,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결국 1년 후인 936년 고려의 10만 대군과 벌인 낙동강 상류(구미 지역)전투에서 대패한 뒤 멸망했다.
후백제 수군과 고려 수군의 해전
수도인 전주의 배후이면서 외국과 교류하는 데 적합한 장소는 영산강 하구지역이었다. 견훤은 901년 대야성 공격에 실패한 뒤 금성(나주)의 남쪽을 공격했다. 그러자 903년에 후고구려의 궁예는 젊은 강화만 해양 세력인 왕건(해군대장)을 파견해 영산강 하구를 급습해서 금성군과 주변의 10여 군현을 빼앗아 ‘나주’로 이름을 바꿨다. 궁예는 909년에 왕건을 나주에 다시 파병했고, 이때 오월국에 파견하는 후백제의 사신선을 나포하고, 진도와 고이도 등을 점령했다. 또 910년에는 견훤이 나주성을 포위하자 수군을 파견했고, 914년에는 왕건을 시중직에서 해임한 후에 나주로 내려보냈다. 이렇게 벌어진 영산강 하구 쟁탈전은 결국 후백제의 패배로 끝났다.


그후 한동안 후백제는 특별한 해군 활동이 없었는데, 932년에 들어서자 돌연 활발해졌다. 9월에 수군으로 고려의 핵심인 예성강에 침입해 지금 북방한계선(NLL) 일대인 연안·배천·정주의 선박을 100척이나 불사르고, 근처인 저산도의 말 300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다시 10월에는 해장군인 상애(尙哀)를 보내 공략했다. 후백제 수군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왕건은 6년간 해로가 막혔다고 한탄했다.
후백제의 국제 관계와 이용 항로
후백제는 해양 능력을 국제 관계에 최대한 활용했다. 10세기에 들어와 중국은 남쪽의 오월국, 북쪽의 후당, 거란 등으로 분열돼 적대 관계를 맺었고, 후삼국 또한 적대 관계인 상황 속에서 국제 관계는 매우 복잡해졌다. 각 국가들은 해양을 이용해 긴박한 외교와 무역을 벌였고, 심지어는 해상 제어와 봉쇄까지 실행했다. 후백제는 896년에 절강성 지역인 오월국에 사신을 보냈고, 909년에도 사신을 파견했지만, 광주의 염해현 부근에서 후고구려의 수군에게 나포됐다. 918년에는 사신과 함께 말을 보냈고, 반대로 927년에는 오월국에서 사신을 파견했다. 925년에는 산동지역에 있었던 후당과 교섭했고, 거란과도 외교 관계를 맺고 무역을 벌였다. 일본과도 교섭해 사신을 대마도에 보냈는데, 이는 신라를 압박하고, 무역을 하기 위해서였다. 929년에는 대마도에 표류한 상선을 도수가 돌려보내자, 사신을 보내 답례했다.

전북 해안지역은 고대에 남북을 연결하는 항로의 중계지 역할을 했고, 황해를 건너온 중국 남방문화가 유입되는 입구였다. 변산반도의 죽막동 유적에서 발굴된 중국계, 왜계의 유물은 이런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동진강을 통해 정읍·김제·고창 등 평야지대로 쉽게 연결되고, 군산지역을 통해서는 금강 하구로 연결된 하계망을 이용해 전북과 충남 일대의 깊숙한 곳까지 교통이 가능하다. 백제 등이 사용했던 만경강은 ‘한천(漢川)’을 통해 전주 시내까지 연결된다. 전주는 이른바 해륙교통과 수륙교통의 합류점이었고, 해양 능력의 중요성을 간파한 견훤은 전주의 이점을 파악하고 수도로 택한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주 사람들은 전주가 40년 가까이 후백제의 수도였으며, 사신선들이 발착했던 국제적인 항구도시였던 사실을 모른다. 정체성이 부족하면 집단은 자체 분열하고, 외부 집단과 경쟁을 벌일 때는 쉽게 파멸한다. 이 때문에 정체성을 찾고, 왜곡을 바로잡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지역갈등처럼 손쉽게 악용돼 집단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후백제’의 등장과 발전은 우리 역사의 분열을 심화시킨 것일까, 아니면 통일을 위한 토대를 놓은 것일까.
√ 기억해주세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견훤은 경상도 상주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씨였으며, 신라의 중앙군으로 출발해 서남해에서 해양방어를 맡은 군인이었다. 그의 세력은 백성들의 불만과 옛 백제 땅이라는 민심을 활용해 달포 사이에 규모가 5000여 명에 달했다. 892년에는 자신을 왕이라 칭하면서 ‘후백제’를 건국했고, 900년에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한 후 후삼국 통일전쟁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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